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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음악가

안토니오 비발디

by 파란하늘정원 2017.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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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다 음악을 사랑했던 로맨티스트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



영화 '샤인을 본 사람이라면 기억 할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피아니스트인 주인공이 헤드셋을 끼고 트램펄린 위에서 풀쩍 뛰는 모습을.







그때 그 헤드셋에서 흘러나온 노래가 바로 이노래이다. 제목은 'Nulla In Mundo Pax Sincera', 우리말로 해석하면 '세상에 참된 평화없어라'라는 뜻이다. 세상의 시선을 벗어던진 채 자유롭고 천진하게 뛰어 오를 때 이 곡이 BGM처럼 흘러나온다. 듣기만해도 마음이 차분하고 평화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이 곡은 비발디가 작곡한 종교 음악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글로리아 RV 589'에 수록 된 모테트이다. '모테트'라는 형식은 '언어'를 뜻하는 프랑스어 'Mot'에서 유래한 말로 종교 성악곡을 말한다. '글로리아'는 비발디가 피에타 고아원의 소녀들을 위해 작곡한 합창곡으로 비발디의 종교 음악 중에서 가장 듣기 쉽고 세속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서 세속적이라는 말이 나쁘게 들릴 수도있다. 하지만 이는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그정도 인기를 끌 만큼 매력있는 곡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비발디가 활동하던 시기의 음악을 가리켜 '바로크 음악'이라고 부른다. (나는 바로크음악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이전까지 교회에서 연주되던 음악이 라틴어로 된 성경을 가사로 한 성악곡 위주였다면, 바로크 음악부터는 점점 기악 위주의 웅장하고 화려한 음악으로 바뀌게 된다. 이때부터 비발디는 헨델, 바흐와 함께 바로크 음악의 삼총사 중 하나로 역사에 남았다. 교과서나 인터넷에서 '비발디'를 검색했을 때 자주 나오는 초상화이다. 







이 그림을 보면 비발디의 외모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게 예쁘장하게 생기지는 않았겠지만 최소한 체격좋고 남성적인 외모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다. 마른 체구에 약해 보이는 모습이다. 그리고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바이올린을 들고 있다. 실제로 안토니오 비발디는 칠삭둥이로 태어나 잔병치례가 잦았다고한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게 햇다. 하나님을 위해 살기를 바랐던 부모의 뜻에 따라 비발디는 15살이 되던 해에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고 25살 때 사제로서 성직자의 길을 걷지만 지병 때문에 미사를 제대로 드릴 수가 없었다. 나중에 비발디는 자신의 지병이 '천식'이었다고 말했으나 사람들의 말은 조금 다르다. 미사를 자주 빼 먹어서 동료들이 그를 찾아다니다 보면 성당 구석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안 그래도 머리색이 악마처럼 붉다는 것 때문에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사람들은 비발디를 '붉은 머리의 사제'라고 부르며 사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비발디 역시 수도원의 생활보다는 집에서 아버지에게 바이올린 수업을 받는 것이 더 했복 했을지도 모른다. 비발디의 아버지인 지오반니 바티스타 비발디는 베네치아에서 이미 알려진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아들에게 집에서 1:1 바이올린 교습을 해 주었고 그 덕분에 비발디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성장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엄격한 규율에 따라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하는 '사제'라는 신분과는 맞지 않았다. 미사 중에 악상이 떠오르면 뛰쳐나와서 푸가를 작곡하기도 했다고 하니 성직자로서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만했다. 심지어 이탈리아의 극작가 골도니는 그를 두고 '비발디는 바이올린 주자로서는 만점이고 작곡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며 사제로서는 빵점이다.'라고 혹평했다. 



당시 베네치아에서는 갓난아기를 길에 버리는 일이 많았는데, 그런 아이들은 귀족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후원으로 질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음악 교사들의 수준도 괘 높았다. 피에타 양육원과의 인연은 비발디가 죽기 직전인 1740년까지 약 40여년간 이어졌고, 비발디의 음악 인생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비발디가 음악 교사로 활동했던 '산타마리아 델라 피에타 성당'




여기서 잠깐 질문아닌 질문을 던져보려한다. '바로크 음악'하면 떠오르는 음악가로 누가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뻔한 질문에 헨델과 바흐를 먼저 꼽는다.

헨델은 음악의 어머니,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라 불려며 후대 사람들에게 추앙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비발디에게 따로 붙이는 별칭은 없다. 만약 비발디에게 별칭을 붙여 준다면 '음악의 할아버지' 또는 '음악의 스승'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왜냐하면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흐가 비발디의 협주곡에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바흐는 진심으로 비발디를 존경했고 그의 협주곡을 성실하게 공부했다.  특히 비발디의 '조화와 영감'은 1711년 암스테르담의 출판사에서 협주곡집으로 내놓은 뒤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다. 이 협주곡집으로 비발디는 일약 유럽음악의 의 개척자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비발디는 다작을 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콘체르토로 불리는 협주곡만해도 500곡 이상을 작곡했고, 독주 악기와 현악 합주를 위한 협주곡은 300곡이 넘는다. 이중에서 바이올린 독주만을 위한 작품은 220곡으로 절반 이상이나 된다. 그래서 곡들이 특색 없고 비슷해 보인다는 비난도 받았다. 심지어 러시아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비발디를 가리켜 '똑같은 곡을 100곡이나 쓴 사람'아니냐고도 했다.



보통 비발디의 '사계'를 직접적으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1번부터 4번까지 쭉 들어보면 정말 좋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빠르게 휘몰아치는 1악장은 바이올린만으로도 강력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연주를 듣다보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느낌이 든다. 사계절 특징 하나하나를 어쩌면 이렇게 잘 표현했을까...신기 할 정도이다. 음악을 듣는 순간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기분, 비발디를 '음악의 화가'라고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사계' 외에도 '조화의 영감'에서 사람들이 잘 아는 유명한 곡이 하나 더 있다. 바로 6번, 작품번호 OP3이다. 아름다운 선율과 리듬으로 곡에 몰입하게 만들며, 특히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더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바로 예전 지하철 5호선과 8호선의 환승 음악이 바로 이 곡이었으니 말이다.





당시 비발디의 몸갑은 얼마 쯤 되었을까? 그는 한 달에 두곡을 써주는 조건으로 피에타 양육원에서 금화를 두 닢 정도 받았다. 또 수많은 연주 여행 중 귀족들에게 곡을 써 주며 받은 고액의 작굑료와 악보 출판 인세까지 합하면 수입이 어마어마 했다고 볼 수 있다. 비발디는 그야말로 '베니스의 왕자'였던 것이다.



비발디의 인생에서 가장 의아한 부분이 있다면 단연 그의 마지막일 것이다. 1740년 피에타 양육원과의 관계가 정리되고, 1741년 7월 28일 비발디는 고향인 베네치아가 아닌 오스트리아 빈의 빈민 묘지에 안장이 되었다. 베니스의 왕자로 불리던 비발디가 어쩌다가 외로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을까? 그 발단은 오페라에 대한 비발디의 열정에서부터 시작된다. 베네치아에 최초의 상업 오페라 극장이 생기면서 오페라의 대중적인 인기가 점점 높아졌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참으로 바람직한 중독인 것 같은데^^ 당시에는 굉장히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 교황정에 오페라를 금지시켜 달라고 탄원서를 넣는 사람들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비발디는 사제였고, 사제로서 오페라에 열정을 쏟는 것은 종교계에서 달갑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 때 비발디는 여인인 제자 안나 지로를 만나고 안나지로와 안나지로의 언니인 피올리나를 알게 되며 그 후 두 여인과 한 집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문제가 된것이다. 사제가 두 여인과 한집에서 생활을 한다니...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로서도 있어서는 안 될 스캔들이었다. 물론 비발디는 부인했지만 의혹은 점점 늘어만 갔다. 소문을 덮을 수 없는 지경까지 다다르자 결국 비발디의 오페라는 상연금지되었고, 피에타 양육원의 음악 교사직도 박탈당했다. 그렇게 베네치아를 떠나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모든 후원이 끊기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그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 신음하다가 끝내 객사하고 만다. 






이 후 비발디를 다시 유명하게 만든 사람, 다시 말해 후세에 비발디를 데뷔시킨 사람이 있다. 바로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흐이다. 바흐는 비발디를 몹시 존경해서 협주곡을 필사 및 연구했고, 현악 협주곡 중 몇 목을 건반 악기용으로 편곡까지 했다. 살아 있을 땐 바이올린으로 이름을 떨쳤던 작곡가, 죽어서는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는 바이올리니스트, 비발디는 클래식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조차 알 수 있을 정도로 오늘날 가장 자주 연주되는 바로크 작곡가이다. 꽃피는 봄에 태어나 눈부신 날들을 보낸 뒤 추운 겨울로 걸어 들어간 비발디의 삶. 비발디의 인생 자체가 그의 대표곡인 '사계'와 닮아 있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현재 우리들의 삶인지도 모르겠다. 








자 료 참 고 : 개인소장도서 "위대한 음악가 30인의 삶과 음악 더 클래식'

이미지참고: 구글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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