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 1685~1750
바흐는 200년에 걸쳐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해 온 유럽 최대의 음악가계이며, 대대로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집안이기도 하였다. 9세때 어머니, 10세때 아버지를 잃은 뒤, 오르드루프의 오르간 주자였던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에게 맡겨져, 학교 교육과 음악 교육을 받았다. 좀 더 상세하게 바흐에 대하여 알아보자.
"이 세상의 모든 음악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Das wohltemperiertes Klavier)' 두 권만 남는다면 그것을 기초로 다시 재건할 수 있다."
음악을 공부할 때 바흐가 세운 기준은 기본 중 기본이다. 그러나 그도 완전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은 아니었다. 비발디 또는 그보다 앞선 작곡가들의 곡을 분석하고 거기서 배운 것들을 다시 후배 음악가들한테 전해 주어 지금까지 계속 새로운 음악이 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음악의 대물림'이라고 부르면 이해가 빠를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이유이다.
엄청난 천재성으로 이런 일들을 한 것 같지만 바흐는 노력파였다. 물론 재능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적인 노력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준을 뛰어넘었다. 사실 바흐는 뼈대있는 집안의 음악가이다. 그의 가문은 약 2세기에 걸쳐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음악의 명문가였다. 심지어 바흐의 자녀 중 3명이 아버지의 뒤를 이러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하기도 했다. 정말 유전학적으로 연구대상이 될 만한 집안이다. 바흐의 아버지 도한 궁정 음악가였다. 이렇게 들으면 참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 같지만 바흐가 태어날 때에는 사정이 좋지 않았다. 10살되 안되어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그는 형의 손에 자랐다. 형인 요한 크리스토프는 오르간 주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바흐는 형한테 오르간과 쳄발로를 배우면서 음악적으로 많은 성장을 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악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바흐한테 보여 주기를 싫어했다. 하루는 바흐가 한밤중에 형의 악보를 몰래 꺼내 달빛 아래서 필사를 했는데 결국 들켜 야단을 맞고 빼앗겼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소년이 아닐 수 없다.
바흐가 오늘날 존경받는 위대한 작곡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재능 때문만은 아니다. 그 뒤에서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그는 당대 유명 작곡가들인 비발디, 프레스코발디, 코렐리, 알비노니 등의 악보를 필사하며 자기 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바흐 역시 살아 있을 때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때는 생계형 음악가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위 바흐의 초상화를 보니 어떤 느낌이 드는가?
앞에서 본 비발디의 초상화와 바로 비교가 될 것이다. 볼에 살이 많고 턱이 두툼하며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굉장히 남성적이고 근엄한 불굴의 의지가 느껴진다. 진자 아버지다운 얼굴이면서 한집안을 책임지는 가장의 얼굴로도 보인다. 앞서 말했듯 바흐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누구보다 아버지의 부재를 느꼈을 그는 아버지로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두번의 결혼 끝에 자식을 20명이나 두었다. 비록 그중 10명만 살아남았지만 말이다. 바흐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짐작이 간다.
그는 22살에 육촌 누이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바흐가 35살이 되던 해에 병으로 먼저 세사을 떠났다. 그리고 일년이 지난 뒤 바흐는 무려 16살 연하인 안나 막달레나를 만나 재혼을 하게 되는데, 어찌나 금슬이 좋았던지 두 사람은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특히 안나 막달레나는 바흐의 악보를 필사하는 등 음악적 내조도 열심히 했다. 집안에는 항상 음악이 흘렀고 안나는 가정 음악회를 종종 열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천생연분을 만난 것이다. 바흐는 작곡가답게 그녀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을 만들어 바친 것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곡이 바로 'Minuet(미뉴에트)'이다. 이곡은 사라 본 이라는 재즈 가수에 의해 'A Lover's concerto'라는 곡으로 재 탄생 되기도 했다. 들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같은 곡인데 느낌이 달라서 둘 다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바흐의 음악 중 앞서 말한 미뉴에트 G장조 외에 대중가요로 편곡되어 인기를 끌게 된 곡이 하나 더 있다. 바로 'G선상의 아리아'이다. 잘 아시다시피 샘플링이라고 한다. 곡의 일부를 차용해서 만드는 기법인데, 1998년에 발표 된 'Sweet Box'의 Everything's Gonna Be Alright가 바로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샘플링한 곡이었다. 이곡은 당시 빌보드 차트 2위까지 올랐으며, 클래식을 잘 몰랐던 사람들에게 'G선상의 아리아'를 많이 알렸다.
살아생전 바흐는 제대로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던 음악가였다. 바이올린 연주라로 인정을 받았던 비발디처럼 오르간 연주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을 뿐 작곡가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자신의 작품이 이렇게 유명해질지 모른 채 눈을 감은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바흐 역시 비발디처럼 말년을 극심한 빈곡속에서 생활했다는 것과 그의 장례식이 빈민 구제 조치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후대의 음악가들, 우리가 음악 천재라고 부르는 모차르트, 베토벤, 슈만 멘델스존, 쇼팽 등은 바흐가 남긴 음악을 기본으로 많은 작품을 썼다. 대위법을 사용한 작품들이 모두 바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베토벤은 어려서부터 바흐의 평균율을 공부했으며, 바흐를 '화음의 원조아버지이며 거대한 바다와 같다'고 극찬했다. 쇼팽은 연주전에 항상 바흐의 건반 음악만으로 연습을 했다고 한다. 멘델스존은 음악 학자이기도 했는데 바흐 음악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의 악보를 찾아 수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흐 본인은 모르겠지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다는 말 그대로 그는 지구 상 모든 위대한 음악가들의 아버지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스승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어땠을까? 바흐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매우 엄하게 훈련을 시켰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면서도 남모르는 다뜻함과 섬세함으로 제가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바흐의 아들인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는 아버지를 이렇게 회상한다. '아버지는 맑고 깨끗한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제자들에게 손가락 하나하나를 위한 연습을 별도로 시켰다. 반년에서 1년까지 계속되는 이 어려운 훈력을 피해 갈수 있는 제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 이 연습에 지치면 아버지는 기거이 그를 위한 연습용 작품을 써 주기도 했다.' 현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바흐처럼 다음 세대를 위해 자신의 노하우와 지식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않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결국 후대를 위해 희생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남기는 사람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바흐의 삶을 통해 이렇게 또 배운다. 우리도 우리의 자리에서 하고있는 일을 통해 다음 세대에 전해질 그 '무엇'을 찾는다면 다음 세대의 아버지이자 스승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자료참고 : 위대한 음악가 30인의 삶과 음악 더 클래식(개인소장도서), 위키백화
이미지: 구글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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